수필ㆍ시

거울 앞에서

작성일 : 2020-05-21 11:20
작성자 : 편집부 (ednews2000@hanmail.net)

 

조기호

 

거울을 본다

길게 휘어져

한 쪽으로 한 쪽으로

아프게 흘러간 강물을 본다.

 

한 생애

다 못다 그리다가

쓸쓸히 야윈 육신을 거느리고

 

이름 없이

봉분(封墳)에 묻힌

깨어진 토기土器의 빗살무늬를 닮은,

목마른 뿌리의 생채기 같은

세월을 본다.

 

대부분의 불행은 눈멀고 귀멀어서 그렇게 되는 것,

웃 단추 하나쯤은 끄르고 조금은 느슨하게 버드나무처럼

흔들렸어도 좋았을 것을, 고개를 숙여 목덜미는 하늘에 맡기고

발등의 꿈 슬며시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했을 것을,

물끄러미 양털구름을 바라보거나 새를 바라볼 수 있는

한 평의 그늘이라도 일구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만질 수 있는 것들보다 만질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하며

가까이 있는 것들보다 멀리 있는 것들에 귀 기울이며,

하늘에게도 한 줌 땅에게도 한 줌 마음 골고루 털어주고

희끗한 웃음 날려 보낼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일어나지 않은 그 모든 것들이

고작 가진 전부였던

가난한 그리움을 본다.

 

준순逡巡과 방황의 시간들 속에서

밤마다 온 몸을 칭칭 감았던,

그러다가

끝내는

사랑이라 부르고 싶었던

켜켜의 주름들을 본다.

-------------------- 【시작메모】 ----------------------------------

 

거울 속의 얼굴이 흐릿하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지난 세월의 흔적들이 깊게 주름져있다. 팔팔 끓어오르는 햇살 같았던, 무작정 솟구쳐 오르는 파도 같았던, 더러는 소주병 속에서도 붉은 꽃을 마음껏 피워내며 어느 때 어디서든지 콸콸 넘쳐나던 물줄기 같던 청춘은 어디로 갔을까. 나는 홀로 희끗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쏜살같이, 그리고 허망하게 지나와버린 삶의 모습들을 문득 떠올려본다.

왜 그랬을까? 가만히 눈을 감으니 살아온 날들이 다 미안해진다. 죄송하고 부끄럽고 송구할 뿐이다. 제대로 듣지 못했고 바르게 보지 못했던, 그래서 숱한 상처를 남겼을 내 삶의 허물들에 대해 왠지 무릎이라도 꿇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좀 더 너그러울 걸, 좀 더 내려놓을 걸, 좀 더 나눌 걸, 좀 더 헤아려줄 걸, 좀 더 손을 내밀어줄 걸, 그리고 크게 한 번 웃어줄 걸…….

가진 것 없지만 그래도 한없이 따뜻했을 ‘좀’과 ‘더’의 그 사랑을 나는 왜 그리워만 했던 것일까. 나는 왜 한 번도 붙들어주지 못했던 것일까. 아등바등 제 욕심을 따라 분주했을 아니, 남모르게 괴롭고 힘들었을 지난날의 삶이 다만 안쓰럽고 아쉬울 뿐이다. 그러나 거울 속에 깊게 패인 저 갈기 같은 주름이란 늘 가난 속에서도 끝까지 사랑을 잃지 않으려고 애태우던 당신의 몸부림이며 거룩함이 아닐 수 없다. 무릇 살아온 날들은 다 아름답고 거룩하다. 남은 날들 또한 부디 그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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