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ㆍ시

오월의 고결한 빛깔

작성일 : 2021-07-14 15:12
작성자 : 편집부 (ednews2000@hanmail.net)

   박 철 한

 

계절의 여왕이라는 오월의 빛깔을 묻는다면 대개 푸르다고 하리라. 오월을 다른 이름으로 ‘푸른 달’이라 일컫는 것은 이른 봄의 새싹들이 자라서 앙상한 가지를 푼더분하게 덮고 노르스름한 땅을 파랗게 물들이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화창한 오월의 거리가 눈부시게 희다. 이팝나무가 양쪽 길가에 느런히 서서 백옥빛깔을 뽐내는 그 길을 이드거니 걸었다. 같은 하얀 꽃이라도 이른 봄의 벚꽃은 새잎이 나기 전에 피어 마음껏 제 빛깔을 뽐낼 수 있지만 이팝나무 꽃은 파란 이파리의 방해를 받으면서도 훨씬 더 희맑다. 네 갈래진 잗다란 꽃송이들의 새하얀 기세가 어찌나 당당한지 어린아이 손바닥만 한 이파리들의 파란 기세조차 감히 오금을 못 편다. 저만치 홍단풍이 청처짐한 가지를 흔들며 붉은빛을 뽐내려 애쓰지만 시답지 않다. 이팝나무 사이사이에서 불그레한 줄기에 초록빛 바늘잎이 오둠지진상하고 성큼하게 서있는 소나무들마저 평소의 도도함을 접고 풀이 죽었다.

이팝나무의 어원에 관하여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그 꽃이 마치 쌀밥처럼 보인다 하여 쌀밥의 다른 이름인 이밥나무로 불리다가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꽃이 입하 무렵에 피는 나무라 하여 입하나무라 불리다가 이팝나무로 되었다는 설이다. 둘 다 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팝나무 꽃이 특이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식물 이름의 어원은 대개 그 식물이 자생하는 지역의 통속적(通俗的)인 말로서 당초의 거센말이 부드럽게 변하거나 첫 글자가 받침이 있다면 그 받침이 없어지고 소리 나는 대로 굳어져 지금의 이름이 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이밥나무가 그보다 더 거센말인 이팝나무로 되었다는 설보다 입하나무가 이팝나무로 되었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 또한 이팝나무는 중부이남지역에 주로 분포하며 예로부터 ‘입하목(立夏木)’으로 불리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10여 그루의 이팝나무들도 대부분 남부지역에 분포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쌀밥의 다른 이름인 이밥은 조선시대부터 평안도에서 널리 쓰이는 말로서 이팝나무가 분포하는 중부이남지역에서는 통속적으로 쓰는 말이 아니다. 따라서 그 꽃이 쌀밥처럼 보이더라도 쌀밥나무라면 모를까 이밥나무라 했을 리 없으니 이밥나무가 변하여 되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한편 이밥은 ‘이쌀밥’의 준말로서 ‘이쌀(또는 니쌀)’이 멥쌀의 방언인 ‘입쌀’이 변한 말인지, 좁쌀에 대한 큰 쌀의 뜻에서 온 것인지, 벼의 분류학상 N초음(初音)을 가진 호칭에서 온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고 한다.

그윽한 향기에다 마치 초여름 날에 눈이 온 것 같은 착각을 줄 정도로 흰 꽃이 특징인 이팝나무거리를 벗어나서도 오월의 산과 들에는 흰빛깔이 가득하다. 길 근처의 푸나무서리 여기저기에 희누르스름한 찔레꽃이 널려 명지바람에 나푼거린다. 다가가서 자세히 보니 희멀끔한 얼굴 한가운데 연노랑 립스틱을 동그랗게 바르고 배시시 웃는다. 장미보다 결코 화려하지 않으나 볼수록 순박하면서도 청초한 멋을 지녔다. 수풀사이에서 철지나 해읍스름한 꽃을 놓지 못하고 서있는 싸리나무는 찔레꽃의 화사함에 기가 죽은 듯 고개를 숙였다. 야트막한 산자락의 아카시아나무도 하얀 꽃을 주렁주렁 달았는데 가지에 사부랑삽작 올라앉아 두리번거리는 다람쥐가 앙증맞다. 아카시아 향기에 흠뻑 취하며 대롱대롱한 꽃송이 한 가닥을 훑어 입에 넣으니 향긋하고 달보드레한 맛이 혀에 감긴다. 이팝나무거리에서부터 산과 들판까지 휘뚜루마뚜루 돌아다니며 보니 푸른 달이라 일컫는 오월의 빛깔이 오히려 희다. 아마도 오월이 천지가 파랑인 단순함이 아쉬워 곳곳에 하양으로 화장을 한 모양이다. 계절의 여왕다운 품위가 엿보이는 빛깔이다.

하얀 사월빛깔 때문인지 전국적으로 벚나무가로수가 제일 많으며 새로 조성된 길에도 가장 많이 심겨진단다. 벚나무는 대부분의 다른 낙엽수들이 앙상한 가지만 드러내놓고 있을 때 잎도 내지 않고 꽃을 먼저 피운다. 다른 나무들이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을 때 먼저 일어나 꽃단장을 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벚나무이니 야비다리를 피울만하다. 하지만 하얀 꽃으로 치자면 벚나무의 사월빛깔은 이팝나무의 오월빛깔에 미치지 못한다. 그뿐이랴. 가로수의 품격도 헌칠민틋한 이팝나무가 더 앞서며 씨앗이 있어 벚나무처럼 종자번식이 가능하다. 여건이 그러함에도 전국곳곳에 벚나무 가로수만 늘어나고 있다니 그동안 이팝나무의 오월빛깔을 무시한 옰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팝나무 가로수 길에는 초여름 내내 백의민족의 품성(品性)을 닮은 고결한 빛깔이 넘쳐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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