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ㆍ시

여인송의 전설

작성일 : 2021-07-14 15:40 수정일 : 2021-07-14 15:40
작성자 : 편집부 (ednews2000@hanmail.net)

                                                        김  미 수필가

 

셋째 형님은 십 년 넘게 손바닥만 한 식당을 운영하며 좁은 공간에 갇혀 살고 있다. 잘 되면 좋으련만 온종일 공치는 날이 많다고 투덜댔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가끔 다른 식당에서 밥 먹을 일도 생겼다. 형님네 식당 생각이 간절하지만 각자 입장이 달라 그곳으로 못 갈 때도 있었다. 혹시, 형님이 다른 식당으로 들어가는 내 모습을 볼까 조바심도 생겼다. 그럴 때마다 빚진 기분이었다.

셋째 형님은 사람이 천년만년 사는 것도 아닌데 바람이나 쐬러 가자고 했다. 그녀는 마음에 욕심 하나 덜어내니 세상사 억지 부리며 살 일도 아니라 했다. 식당 문 닫고 다녀오자며 서둘렀다. 시누이, 둘째 형님과 언니까지 좌석을 꽉 채웠다. 막내인 내가 운전이 서툰 탓에 운전대는 셋째 형님의 몫이 됐다.

그녀의 차는 20년이 된 노후차량이었다. 다른 차로 갈까 했지만, 보험 관계로 어쩔 수 없었다. 차량은 부르릉 툴툴대며 헛소리까지 해 됐다. 비가 많이 온다고 하더니) 차 안은 밀림 속처럼 후덥지근했다. 형님들의 과체중 때문에 뒷좌석에 끼어 앉았더니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거기다 차까지 덜컹거려 비포장 길에 말 타는 기분이었다. 입은 꽉 다물어야 했다. 행여 혀라도 물릴까 싶었다. 과속 방지 턱이 높은 곳은 머리통이 차량 천정에 부딪히기가 다반사였다. 짐짝처럼 굴러도 깔깔거리며 웃다 보니 견딜 만했다. 에어컨까지 고장이었다. 아무리 만지고 올려도 맥 떨어진 노인처럼 온도는 변함이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밖에 나오니 즐거워 고생을 해야만 추억에 남는다고 깔깔거렸다.

차 안의 사람들의 들뜬 기분과는 다르게 창밖은 멀겋고 하늘의 구름은 낮아 보였다. 들판에는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가 액자 속 그림처럼 아련했다. 어린 시절 풋보리와 얽힌 사연이 실패 속 실처럼 풀려 나왔다. 모내기를 끝낸 어린 모는 부화한 오리의 깃털 같았다. 수확기를 앞둔 양파는 고개를 숙인 채 은밀하게 밑동을 채워 가고 있었다.

형님들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다 달았다. 천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신안은 디딤돌 놓아 하나의 커다란 마을이 되어가고 있다.

자은도 분계 해변 입구는 엉성한 풀과 모래가 섞인 풀밭이었다. 더 깊게 들어설 때마다 쭉쭉 뻗는 소나무들이 서 있었다. 모래톱 중턱에 아름드리 소나무는 수문장 같았다. 세월을 묵은 소나무는 한참을 올려 봐야 끝이 보일 않을 만큼 컸다. 소나무는 우람한 크기로 보면 듬직한 남성적인 느낌이었다. 아니, 그건 건성으로 본 탓이었다. 다리의 매끄럽고 부드러운 곡선은 여인이 하늘을 향해 다리를 쳐든 모양이었다. 쭉 뻗은 여인이 누워 하늘을 올려 보는 형상이었다. 자세히 볼수록 여인의 관능적인 하체였다. 여인의 오목한 불두덩이 소나무 중턱에 붉어져 나왔다. ‘나는 여인송입니다’라고 말해 주고 있었다. 두 다리가 만나는 곳은 굳게 뒤틀어 옹달샘만은 숨기고 싶다는 듯 다리를 꼬고 있었다. 여인의 상체인 베갯머리에서는 하얗게 거품을 물고 파도가 달려들었다. 파도는 언제든 옹달샘만은 확인해야겠다는 기세였다. 감춰진 듯 조용한 해변에는 인적은 없고 파도 소리만 쏴쏴 철썩철썩 밀려왔다. 한참을 찾다 보니 희미하게 새겨진 비석이 있었다.

“옛날 분계 마을에 가난하지만, 고기잡이를 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부부가 있었다. 어느 날 사소한 말다툼을 별이고 고기잡이를 나간 남편이 큰 풍랑을 만나 돌아오지 않았다.

후회한 부인은 날마다 이곳 솔들에 올라 멀리 우각도 너머 수평선을 바라보며 남편의 무사 귀환을 애타게 빌며 기다렸다.

그러나 날이 가고 달이 지나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부인은 어느 날 밤 꿈속에서 소나무 숲에 물구나무를 서서 보니 남편이 배를 타고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다음 날부터 부인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분계의 제일 큰 소나무에 올라 남편이 배를 타고 오는 환상을 보곤 하였다. 어느 추운 겨울날 기다림에 지친 아내는 소나무에서 거꾸로 동사하게 되었다,

그 후 돌아온 남편이 아내의 시신을 수습하여 그 소나무 아래에 묻어주자

소나무는 거꾸로 선 아름다운 여인의 자태를 닮은 ‘여인송’으로 변하여 지금까지 남아 있다.

연인 간의 사소한 말다툼이 천추의 한으로 남을 수 있다는 교훈과 아름다운 기다림을 간직한 여인송에는 부부의 금슬을 좋게 만드는 신령스러운 힘이 있다고 전해진다.

옛날 한 여인이 남편의 바람기 때문에 고민하다가 이 여인송을 두 팔로 끌어안고 하소연하자, 그 뒤로 남편의 바람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 후 연인끼리 여인송을 두 팔로 감싸 안으면 백년해로를 이룬다는 소문이 퍼져 오늘도 수많은 사람이 찾아 소원을 빌며 사랑을 키워간다.”

신안군 자은면 백산리 분계해변 ‘여인송’에 붙어 있는 안내 문구다.

한참을 읽다 보니 함께 왔던 셋째 형님이 보이지 않았다. 먼저 산에 올랐나 살피니 조용한 푸른 숲속에 뻐꾸기 소리만 들렸다. 내려올 충분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셋째 형님이 아직 오지 않았다. 다시 되짚어 올랐다. 셋째 형님만 안 보일 뿐 그대로였다.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만 더 크게 들렸다. 샅샅이 뒤졌지만 셋째 형님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름도 외쳐보았지만 빈 메아리뿐이었다. 해변의 숲이 우거진 곳에 알을 품은 새처럼 옹송그린 셋째 형님이 앉아 있었다. 안심되었다. 셋째 형님은 삼십 대 후반 남편이 음주운전 중 음주측정을 피하려 강물로 뛰어들어 목숨을 잃었다. 셋째 형님은 남편을 죽기 살기로 짝사랑해 결혼까지 했다. 가난한 남편의 마음을 사기 위해 친정집 논 전답까지 바쳐 겨우 마음을 샀다. 그 때문에 셋째 형님이 지금까지도 원망과 미움 속에 살았다. 칠십이 된 셋째 형님은 척추 이상이 생겨 바로 걷지 못했다. 형님은 남편을 원망하면서 반평생 살아왔다.

‘여인송’이 남편을 원망하는 마음으로 허송세월한 나를 이제부터는 가볍게 살다가 가라며 타일렀다고 했다. 셋째 형님은 인생의 무거운 봇짐을 부려 놓은 곳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그날 밤 형님은 파도가 철석거리는 민박집에 누워, 이제는 감사한 마음으로 살겠다며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들의 이번 여행은 ‘꿩 먹고 알 먹고 새우 잡고 도랑 쳤다’며 환하게 웃었다. 내일은 일찍 출발해 셋째 형님이 차려주는 병어 찜을 점심으로 먹기로 했다.

 

 
#김미 #수필가 #여인송의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