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ㆍ시

배려(配慮)

작성일 : 2021-10-13 14:34
작성자 : 편집부 (ednews2000@hanmail.net)

     박 철 한

 

장대비가 내리는 날에 길가에서 승용차 운전자끼리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골목길에서 큰길로 나오려던 차와 직진하던 차가 충돌한 모양이다. 한쪽에서는‘골목길에서 나오면서 좌우를 살피지도 않느냐’라고 따지고 상대방은‘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전조등도 켜지 않느냐’라고 맞받아친다. 아마 승용차가 골목길에서 큰길로 진입하며 폭우에 전조등도 켜지 않고 다가오던 차를 미처 보지 못하고 일어난 사고인 듯 했다.

승용차를 운전할 때 눈이나 비가 오면 대낮에도 전조등을 켜야 한다. 밤에 켜는 전조등은 앞을 밝혀 살피기 위함이지만 비 오는 낮에 켜는 전조등은 앞을 밝히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운전자들의 눈에 잘 띠게 하기 위함이다. 즉 자신보다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의미가 더 크다는 뜻이다. 따지고 들자면 그것도 결국 자신이 사고를 당하지 않으려고 그러는 것이니 결코 남을 배려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흔히 전조등을 켜지 않아도 운전하기에 불편하지 않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음을 망각할 수 있다. 만약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데 대낮이라 하여 전조등을 켜지 않는다면 상대 운전자들이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빗물에 아롱진 백미러에 불빛도 없이 뒤를 따르는 그 차량이 잘 보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낮에 전조등을 켜는 것은 우선 남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이 결국 자신에게까지 이익이 된다는 의미로 해석함이 옳으리라.

초보운전 시절의 어느 가을날이었다. 갈대와 야생화가 흐드러진 하천두둑의 좁은 길을 가던 중이었는데 반대편에서 트럭 한대가 다가오는 것이다. 마주친 곳에서는 두 대의 차량이 교차할 수 없었으므로 둘 중 한쪽은 두 대의 차량이 교차할 수 있을만한 곳까지 후진을 해야 했다. 그런데 왜 상대방이 후진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부터 앞서는 것일까? 어쩌면 당시에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이기심(利己心)고질병’을 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앞뒤를 살펴보니 이쪽에는 불과 삼십여 미터 후방에 두 대가 지나칠만한 곳이 있었지만 반대쪽에는 백여 미터 이내에 적당한 곳이 눈에 띠지 않았다. 아무리 보아도 이쪽에서 후진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초보운전인데다 좁고 구불구불한 길인지라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후진을 하려고 앞뒤로 왕복운동을 하며 한참을 헤매자 이내 저쪽 차량의 중년남성운전사가 차에서 내려 다가왔다. 운전이 서툴러 보였는지 경력을 묻더니 자신이 후진을 하겠다며 따라오라는 것이다. 고맙다는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그때부터는 그저 조심스럽게 후진하는 그 차량을 서서히 따라가면 되는 일이었다. 하늬바람에 한들거리는 이름 모를 야생화들과 하얀 갈대이삭을 스치며 한참을 나아가서야 겨우 교차할만한 지점을 찾을 수 있었다. 차가 교차하며 트럭운전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는데 길옆의 구절초 몇 떨기가 활짝 꽃 웃음을 치는 그 곳은 처음 마주친 곳에서 족히 백 미터가 넘어보였다. 그 후 필자는 좁은 길에서 당시와 비슷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먼저 양보하려는 마음자세를 갖추게 되었다. 남을 배려하는 당시 운전자의 자세가 무조건 남이 양보해 주기를 바랐던 필자의 이기심고질병을 고쳐 준 명약이었던 셈이다.

언젠가 23명의 한국인들이 아프가니스탄을 여행 중에 ‘탈레반’이라는 이슬람원리주의 단체에 납치된 일이 있었다. 사건이 발생 후 한국정부에서 석방협상에 나섰으나 결국 2명이 살해당하는 불행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다행히 나머지 21명은 석방되었던 사건이었다. 그 사건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납치되었던 한 여성의 동료애가 전 국민을 숙연하게 했다는 점이다. 석방 협상이 진행 중에 납치단체에서 한국인 2명을 지명하고 석방하려 하자 그 중 한 여성이 남겠다고 양보하여 대신 다른 사람이 석방될 수 있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생명을 담보로 하는 사건인지라 자칫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지도 모를 극한 상황에서의 배려임을 감안할 때 실로 감동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인간에게 빼놓을 수 없는 덕목이라지만 ‘탈레반’에 납치된 여성처럼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경우라면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자신이 양보해야 할 상황임에도 남이 양보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부터 앞선다면 그것은 ‘이기심고질병’을 앓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비나 눈이 내리는 대낮에 켜는 전조등처럼 남을 위하고 결국 자기에게도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실천하지 못할 이유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으랴.

 
#박철한 #수필가 #배려 #미래교육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