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5-06-16 09:59
작성자 : 편집부 (ednews2000@hanmail.net)

박 철 한
신록(新綠)의 계절 5월이 열렸다.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바다엔 물고기가 득시글거리듯이 계절상으로는 5월이 그렇다. 즉 더위가 싫은 식물들이나 추위가 싫은 식물들 모두 좋아하는 계절이니 만물을 품어 안을 만한 아량을 지녔다고 해야 하리라. 인간이 재배하는 일년생 농작물을 보면 그 까닭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여름작물들은 서리가 내리지 않는 5월부터 가을까지 자라며, 월동작물들은 가을에 싹을 틔워 이듬해 6월초까지 자란다. 따라서 여름작물과 겨울작물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계절은 오직 5월뿐이다.
자동차로 30여 분 거리의 고향마을 뒷산에 올라 만춘의 정취를 느끼며 나물이라도 뜯어올 요량으로 나섰다. 차창 밖의 등나무가 탐스런 지치보라 꽃송이를 주렁주렁 달았다. 들녘에는 볍씨를 뿌리는 농부들과 고추 모종을 옮겨 심는 아낙의 손길이 바쁜데, 바로 옆 밭 다랑이에서 겨울을 난 마늘은 어른이 다 되어 잎 끄트머리가 누렇다. 들판을 지나니 보름 전까지도 하얀 벚꽃이 수놓인 치마를 두르고 있던 산들이 그새 연초록 치마로 갈아입었다.
고작 10여 가구의 고향마을, 입구의 아카시아와 이팝나무가 새하얀 꽃을 잔뜩 매달고 봄바람에 흐느적거리며 뽐낸다. 하지만 저만치 뙈기밭에서 봄이 오기도 전에 가장 먼저 꽃을 피우고 벌써 열매까지 통통하게 살찌운 매화나무가 게으른 그들을 비웃는 듯하다. 텅 빈 골목을 지나니 마을 뒤쪽 골짜기의 실도랑이 아직도 졸졸대며 흐르건만, 그 물길을 따라 즐비한 계단식 묵정논배미들에는 잡관목이 호랑이 새끼칠만하게 우거졌다. 논틀밭틀을 지나 가시덤불을 헤치고 간신히 산에 올랐다.
입구에서부터 5월 신록의 정취가 위없이 멋스럽다. 노란 송화 가루를 벌써 날려 보낸 소나무 새순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단풍나무의 붉은 꼬투리가 새파란 이파리 사이사이에서 대롱거린다. 산딸나무가 이파리와 비슷한 연녹색의 네 갈래진 꽃잎을 내고는, 남의 눈에 잘 띠지 않음을 용케 알았는지 이제야 하얗게 바꾸려고 애쓴다. 신갈나무 이파리들도 그쯤 자랐으면 이제 도토리를 키워낼 수 있을 듯하다. 이미 시들어진 꽃잎을 버리지 못하는 철쭉의 집착이 안타깝지만, 옆자리의 산벚나무에는 어느새 버찌가 빨갛게 물들고 있다. 산나물을 얻으려는 목적이 아니었으니 한참을 헤매고도 수확물이라야 고작 취나물 몇 줌이 전부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른 아침 동산마루가 뱉어 올린 태양이 어느새 중천에서 이글거린다. 실개울에서 목을 축이고 근처의 너럭바위에 앉았다. 문득 “이때쯤 어디선가 뻐꾸기가 울어 준다면 얼마나 낭만적일까!”라는 생각을 하며 은근히 기다렸다. 그러나 고향생각을 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끼어드는 뻐꾸기 소리는 이내 들리지 않았다. 산비둘기의 구구대는 소리도 그런대로 운치가 있었으련만 그마저도 들을 수 없었고 이따금씩 깍깍거리는 까치만이 고요를 깰 뿐이다.
늣먹으며 쉬고 있는데 맞은바라기의 골짜기에서 고라니 한 마리가 올망졸망한 다랑논배미를 잽싸게 가로지른다. 5월은 초식동물들의 먹이인 풀들이 가장 잘 자라는 계절이기도 하니 고라니도 신이 났던 모양이다. 저만치 풀밭에서도 장끼가 까투리를 청하는 듯 꺽꺽푸드덕하고는 고개를 쳐들어 두리번거린다. 꿩은 봄에만 번식을 하는 습성인지라 여름이 오기 전에 짝을 찾아야 하리라.
발길을 재촉하여 인근에서 꽤 높은 산꼭대기에 오르자 사방이 확 트였다. 상큼한 바람이 가마솥처럼 김이 오르고 있을 얼굴을 식히며 산을 넘는다. 눈앞에는 저 멀리까지 장엄하게 이어지는 산봉우리 군단(群團)과 그 사이사이에 깃든 인간 자리가 겸손하게 펼쳐졌다. 그 경관(景觀)에는 “인간은 대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라는 메시지가 투영되어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온통 연초록빛이다. 푸나무가 이때를 기다려 이파리를 내고 있음이리라. 갈맷빛 한여름 산이 중년일 것이요, 울긋불긋한 늦가을 산이 황혼이라면, 신록이 빚어낸 5월의 산은 청춘일 것이다. 가만히 눈을 감으니 부지런히 새잎을 내고 있을 푸나무들의 거친 숨소리가 마치 월드컵 결승전의 함성처럼 들리는 듯하다.
산을 내려와 고향마을을 이렁저렁 둘러보니 대낮이지만 인기척도 없이 적막에 휩싸여 있다. 고향의 5월 산천은 함성이 가득하고 활기가 넘치건만 인간마을은 언제부터인지 늘 혼곤(昏困)히 잠들어 있을 뿐이다. 마을을 나서려는데 시커먼 서산이 의연하게 가로 누워 뉘엿뉘엿 지는 해를 덥석 물더니 이내 꿀꺽 삼키고 만다. 생기 넘치는 5월의 신록을 보았던 그날은 홀로 산에 올랐어도, 고즈넉할 뿐 쓸쓸하지 않았으며 고요했으나 결코 적막하지 않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