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6-05-11 09:41
작성자 : 편집부 (ednews2000@hanmail.net)

김 미
봄이 오면 마을 풍경도 달라진다. 집들 사이로 드러난 텃밭에서 자라는 마늘과 양파가 실해진다. 가늘게 커가던 마늘대가 제법 단단한 기둥을 세운다. 제대로 된 마늘쪽을 거느리겠다는 의지 같다. 예전처럼 많은 양은 아니지만, 양파 빛도 짙은 녹색으로 물든다. 봄비와 비료를 먹으면 신비할 만큼 양파대도 하루 사이 밑동이 야물어진다. 떡잎부터 클 성부른 것들이 보인다. 남의 밭이지만 눈요기하는 재미가 크다. 백화점에서 아이쇼핑(window shopping)할 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마음이 흡족해진다.
서너 집 건너 키우는 닭들의 울음소리도 위로 치솟듯 가볍다. 날갯짓하며 저희들끼리 몸 부딪치는 소리까지 들린다. 행여나 추울까 덧씌운 겉포장을 걷어낸 덕이다. 앞뒷산 숲의 나무 색깔이 선명하게 드러나 보인다. 저 나무 사이에 하얀 벚나무가 있어 희끗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덜 녹은 눈처럼 엉성한 나무숲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를 내보인다. 마을 앞 가로수가 하얀 홑이불을 빨랫줄에 휘날리는 듯 언뜻언뜻 눈에 환하다. 그 꽃이 비바람에 지고 나면 연녹색 잎들이 흰 꽃 사이에서 보이기 시작한다. 이 무렵이면 마을에 꽃바람이 출렁인다.
마을 어르신들은 마을 소풍을 가야 한다며 기지개를 펴듯 발동을 걸기 시작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소풍을 다녀오라며, 마을에서 나고 자란 ‘문순금’ 사장이 후원금을 보내왔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이라는 ‘둥지’의 아련한 기억 때문에 매해 후원금을 주시는 분이다. 그녀를 아는 어르신들은 많지 않다. 다만 어르신들은 그녀가 지독히도 가난했지만, 유독 후덕했던 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딸이었다고 기억한다. 그 고향에 대한 기억으로 마을에 최초로 노래방 기기를 후원해 주기도 했다. 마을 어르신들은 이제 매년 소풍 기금을 주는 따님 덕분에 봄을 기다리는 재미로 산다.
마을 분들은 엉성한 가지에 하얀 꽃이 휘날리면 나들이할 생각에 마음이 부푼다. 어디로 갈 것인가는 별로 관심이 없다. 함께 어울려 관광버스를 타고 떠난다는 생각만으로도 닭이 날갯짓을 하듯 마음이 환해진다. 마을 사람만 가기에는 모처럼 마음먹고 빌린 차가 헐렁하여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마을에서 살다가 인근으로 이사 간 사람들을 모두 부른다. 그 숫자가 원주민보다 더 많다. 시댁 마을에서 꽃 같은 신혼 시절을 시부모 시하에서 보냈던 며느리들도 함께 버스에 오른다. 지금은 칠십이 넘어 팔십을 향해 가는 형님들이다. 함께 떠나자는 소리에 요양보호사 일도 하루 휴가를 신청했다. 노인 일자리가 없는 날로 소풍날을 잡았다. 모두가 거리낌 없는 날이 가장 좋은 날이 된 것이다.
경비 문제로 원주민은 그냥 가자는 측과 똑같이 자부담을 내야 한다는 측의 의견이 갈리기도 했다. 결국 남는 경비는 마을에서 점심 먹는 날의 식비로 넘겨, 한 끼를 더 영양가 있게 먹자는 쪽으로 결정되었다. 만사가 의견만 내면 한결같은 마음으로 통과되었지만, 특정 인물을 함께 모시느냐 마느냐로 의견이 엇갈렸다. 작년에 입담이 좋아 좌중을 웃게 만들었던 언니가 문제였다.
마을 어르신들은 여행지에서 걷는 일이 몸에 부친다. 그래서 목적지 입구 주막에 자리를 펴고 앉아 버렸다. 다리가 성한 사람들은 인파에 섞여 목적지를 향해 나섰지만, 주막에는 어르신들이 물가에 고동처럼 입담 좋은 언니를 둘러싸고 앉았다. 그 자리에서 탐스런 수국처럼 잘 웃던 언니가 집안에 좋은 일이 생겼다며 음식 값을 쏘겠다고 선언했다. 그 말에 더 신바람이 난 입담파 언니가 마이크를 잡듯 큰 목소리로 익살스러운 이야기를 마치면 어르신들의 얼굴은 봄꽃처럼 환하게 피어났다. 그 모습이 봄나물이 무리 지어 수수한 꽃을 피우듯 사랑스러운 마음까지 든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를 몹시 거슬려 하는 마을 언니가 있다. 입담 좋은 언니가 하는 말마다 "무슨 여자가 예의 없이 남의 마을에 끼어왔으면 조용히 놀다 갈 일이지"라며 내내 눈을 흘긴다. 그녀는 내년에도 저 여자를 부르면 자신은 마을 소풍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 말이 입담 좋은 언니의 귀에 들어갈까 조바심이 났다. 반면 입담 좋은 언니의 야담에 재미를 본 분들은 분노했다. 어떤 형태로든 그날 즐겁게 보내면 될 일이지, 가당찮게 얌전빼지 말라는 것이다. 입담 좋은 언니 곁에 고동처럼 모인 어르신들도 비위가 뒤틀렸다. 듣기 싫으면 저만 안 들으면 그만이지, 왜 우리들이 재미있게 웃는 일을 그런 눈으로 보느냐며 입을 삐죽였다.
참 난감하다. 원주민의 뜻을 무시할 수도 없고, 고동처럼 둘러앉아 오지게 웃는 어르신들의 재미도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다. 이번 소풍날이 정해지자 어르신들은 입담 좋은 언니를 꼭 부르라고 당부했다. 눈치껏 그녀를 부르긴 했지만 조심스럽다. 부디 아무 일 없이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마을에서는 오늘부터 소풍 음식을 장만하기 위해 계획 중이다. 쑥을 뜯기로 했다. 공동 작업으로 삶는 일까지 마쳐 쑥 절편을 만들기로 했다. 생각만 해도 입맛이 돈다. 쫄깃쫄깃 쑥 향이 묻어난 절편을 빨리 먹고 싶다. 연로하여 소풍 참여가 어려운 어르신들께는 쑥떡과 과일, 홍어를 조금씩 나누기로 했다. 거동이 불편해 참여하지 못하니 음식으로라도 위로할 생각이다.
오늘의 봄 소풍을 만들어 준 문순금 사장님께는 이 고마움을 조금이나마 성의 표시하고 있다. 가을이면 인근에서 제일 좋은 깨 농사를 지은 사람을 눈여겨보았다가 그 깨를 구입한다. 가격이 높을수록 좋다. 그만큼 여물고 깨끗한 깨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참기름으로 짠다. 참기름 병 겉포장 갱지를 구입해 싸고 또 싼다. 마을 아주머니들이 온 정성을 다한 것이라 얼굴을 보고 전해 드렸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문 사장이 바쁠 것이라 차마 말하기 어렵다. 문 사장의 동생을 통해 고이 보내 드린다. 조금이나마 마음을 전한 듯해 마음이 좋다. 금년 봄나들이로 우리 마을 어르신들은 나머지 계절을 잘 보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